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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2-18 13:13
현대미술 쉽게보기 - 파리의 보헤미안, 모딜리아니
 글쓴이 : 재원아트
조회 : 8,713   추천 : 0  
   http://navercast.naver.com/art/theme/2082 [649]

모딜리아니

 

 

20세기 초의 근현대 미술사는 반 고흐와 같이 지독한 가난으로 처절한 삶을 보낸 많은 젊은 작가들의 업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도 그들 중 한 명이다. 모딜리아니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고, 사후 거의 500배 이상 작품 값이 뛰어오르는 등 세월이 흐른 뒤에 그 명성을 인정받은 화가이다.

 

 

모딜리아니의 유년기

모딜리아니는 유태인으로 이탈리아 리보르노 지방에서 태어났다. 항구 도시 리보르노는 오랫동안 종교적 박해를 받은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 역할을 한 도시였고, 유태인 사회의 고향 같은 도시였다. 모딜리아니는 아버지 플라미니오 모딜리아니와 어머니 유지니아 가르신 사이에 태어난 넷째 아들이었다. 그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 플라미니오는 사업에 실패하였지만, 모딜리아니의 출생으로 인해 집안이 완전히 망하는 것은 면하게 되었다. 임신한 여자나 갓 태어난 아기 엄마의 침대는 빼앗아 가지 않는다는 옛 속담이 있었기 때문에 채권자들이 물건을 다 압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방 행정관이 그의 집에 들어갔을 때 마침 유지니아는 아이를 낳고 있었고, 가족들은 집에서 가장 값비싼 자산들을 유지니아 곁에 올려놓고 보호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의 어머니는 10살까지 집에서 아들을 가르쳤던 지적인 여성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해 자주 병마에 시달렸으며 11살에 늑막염을 앓았고, 그 몇 년 뒤에 또 다시 장티푸스로 고생하였다. 16살이 되었을 때는 결핵에 걸렸다. 두 번이나 걸린 늑막염이 낫고 나서,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나폴리, 로마 그리고 아말피 등지의 이탈리아 남부와 피렌체, 베니스를 여행했다. 그의 어머니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들의 예술 방면에 가진 천부적인 능력을 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딜리아니가 11살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노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 아들의 재능은 아직 형성되지 않아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할 수는 없다. 모딜리아니는 응석받이 아이처럼 행동하지만 인지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외피 안에 있는 것을 보고 기다려야만 한다. 아마도 예술가일까?”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모딜리아니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아이로 알려졌고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어머니가 ‘이미 화가’라고 일기에 쓴 대로 자신도 화가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미술에 대한 아들의 열정에 만족했다. 14살에 장티푸스를 앓았을 때 모딜리아니는 의식이 혼탁한 상태에서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팔라초 피티에 있는 그림들을 보여 달라고 헛소리를 했다. 모딜리아니가 살던 리보르노 지역의 미술관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대가들의 그림이 단지 몇 점 소장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는 피렌체의 르네상스 대가들에 심취해 있었고 아픈 상태에서 그 작품들을 직접 볼 기회가 결코 없을 것 같은 생각에 실망하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병이 나으면 피렌체에 데려갈 것을 약속했고, 이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들과 함께 여행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리보르노의 화가 미켈리(Micheli)에게 그림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미술학교 등록도 해주었다. 1898년부터 1900년까지 모딜리아니는 미켈리의 미술학교에 다녔다. 여기서 그의 초기 작품 경향이 형성되었고 이탈리아 미술의 주제와 양식 연구에 깊이 열중하게 되었다. 모딜리아니의 초기 파리 시대의 작품을 살펴보면, 르네상스에 대한 모딜리아니의 연구 경향이 나타난다.

 

 

10대 모딜리아니, 미술과 문학에 영향 받다

1901년 로마에 있는 동안 모딜리아니는 화가 도메니코 모렐리(Domenico Morelli)의 작품에 감탄했다. 당시 모딜리아니는 마치아이올리 (Macchiaioli)(외부의 빛에 의해 변화하는 실물을 그려내는 경향으로 주로 풍경화를 많이 그렸음)라는 인습 타파주의자의 그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소규모 미술 운동은 아카데믹한 그림을 그리던 풍경화가들의 부르주아적 양식에 반대했다. 마치아이올리의 미술 운동은 프랑스 인상주의와 공통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있지만 클로드 모네와 그 주변의 화가들이 했던 것처럼 국제적인 미술 운동으로 충격을 던져 주진 못했고 오늘날 대부분 잊혀져 있다.

 

 

 

모딜리아니와 이 혁신적인 미술 운동과의 연결은 그의 첫 선생님인 미켈리를 통해서였다. 미켈리는 마치아이올리의 멤버일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의 창시자로 유명한 지오반니 패토리(Giovanni Fattori)의 제자였다. 그러나 미켈리의 작품은 유행에 따르는 매우 진부한 양식을 가진 작품이었고, 이러한 경향은 젊은 모딜리아니에게 거부감을 주었다. 모딜리아니는 실내에서 특히 자신의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더 선호했고 미켈리가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은 따르지 않았다. 풍경화를 그릴 때조차 모딜리아니는 ‘마치아이올리 양식’보다는 세잔에 더 가까운 초기 큐비즘 양식을 선택했다. 1902년, 모딜리아니는 드로잉을 배우기 위해 피렌체의 ‘무료 누드 연습’ 학교에 등록했고 1년 후에는 베니스로 옮겨 그곳의 예술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모딜리아니가 대마초 흡연을 시작한 곳이 바로 평판이 나쁜 베니스에서였다. 모딜리아니의 생활 방식은 단순한 10대의 반항이나, 혹은 당시 많은 작가들이 빠졌던 진부한 쾌락주의, 보헤미안적 생활 방식보다 더 심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경험이 그의 예술적 양식을 발전시킨 원동력이라는 억측을 낳기도 했다.

 

미술과 함께 어린 모딜리아니의 예술적 감수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문학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외할아버지 이사코 가르신(Isaco Garsin)의 후견 아래 학구적이고 지적인 문학을 경험하면서 니체, 보들레르, 로트레아몽과 같은 문인들의 글을 읽었고 진실한 창조의 길은 오직 반항과 무질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자신의 믿음을 발전시켰다. 특히 파리의 초현실주의 미술에 영감을 준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Les Chants de Maldoror]는 모딜리아니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다. 로트레아몽의 시는 환상적인 요소를 서로 대치시키고, 가학적인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10대 초기에 이 작품에 사로잡힌 사실은 그의 미적 감각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모든 조숙한 10대들처럼 모딜리아니는 나이 많은 친구들을 더 좋아했고, 학교 친구인 길리아가 사춘기 시절의 좋은 친구 역할을 해주었다. 모딜리아니가 친구 길리아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파리의 보헤미안, 모딜리아니


1906년에 모딜리아니는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 파리로 거주지를 옮겼다. 모딜리아니가 파리라는 예술적 실험의 중심지에 도착했을 때,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또 다른 두 외국인 예술가들인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후안 그리스(Juan Gris)도 동시에 파리에 입성했다.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의 가난한 화가들의 모여 사는 라 바토-라부아르(La Bateau-Lavoir) 지역에 작은 스튜디오를 빌려 정착했다. 그곳 대부분 화가들은 가난했지만, 모딜리아니가 빌린 스튜디오는 르네상스의 복제품과 플러시 천으로 휘장하여 나름 조화로운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고, 모딜리아니의 외모 역시 퇴폐적이라기보다는 말쑥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모딜리아니는 어머니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썼고, 아카데미 콜라로시(Academie Colarossi)에서 누드를 스케치했고, 술도 적당히 마셨다. 당시 그는 비사교적이고 따로 행동하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파리에 도착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그의 품행과 평판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말쑥하고 아카데믹한 작가의 이미지에서 유랑자들의 일인자처럼 변해 버렸다. 검은 모자와 빨간 스카프를 통해 예술가의 보헤미안적 외모를 가장했고,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빈민가를 어슬렁거리듯 돌아다니곤 했다.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루이스 라투레트(Louise Latourette)는 모딜리아니 작업실의 벽에 걸려 있던 르네상스 복제품이 떨어져 나가고 플러시 휘장 또한 어지러이 황폐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모딜리아니는 이미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고, 작업실은 이러한 피폐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모딜리아니는 작업실에 걸려 있던 모든 부르주아적 흔적들을 없앴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린 모든 초기 작품들마저 없애 버렸다. 초기 자신에 대한 모딜리아니의 폭력적인 경향은 아마도 결핵이라는 자신의 병에서부터 기인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병에 걸렸을 때부터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요절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결핵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은 삶이 지속되는 동안 즐기는 것,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 쾌락에 빠지는 것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보헤미안적 환경 속에서 여자들과 잦은 애정 행각을 벌였고 알코올, 압생트, 마약에 중독되었다. 술에 취했을 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옷을 벗기도 했다. 그는 점점 반 고흐처럼 비극적인 작가의 전형이 되어 갔다. 그런 와중에서도 초기 파리 시절, 모딜리아니는 엄청난 속도로 그림 작업을 했다. 끊임없이 스케치하고 하루에 백여 장에 이르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 중 상당 부분은 잃어버렸고 좋지 않은 작품은 없애 버리거나, 잦은 이사로 인해 버려졌으며 여자 친구들에게 준 작품들은 제대로 보관되지 못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처음에는 로트렉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1907년경에는 폴 세잔의 영향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어떤 양식의 카테고리에도 포함되지 않는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왜곡된 코, 길게 늘어진 목과 마스크의 독특한 양식

 

 

1909년, 모딜리아니는 거친 생활로 인해 심신이 지치고 건강이 나빠져 고향 리보르노에 돌아갔다가 곧 다시 파리의 몽파르나스의 작업실로 되돌아갔다. 그는 원래 화가보다는 조각가가 자신에 더 알맞다고 생각했고 열정적인 젊은 아트 딜러 폴 길라윰(Paul Guillaume)의 소개로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나면서 조각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졌다. 그의 일련의 조각 시리즈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살롱 도톤(Salon d’Automne)에서 소개되었지만, 전쟁이 발발해 조각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육체적 쇠약 때문에 모딜리아니는 조각을 포기하고 그림에만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모딜리아니의 조각은 그가 미술관에서 접했던 아프리카와 캄보디아의 미술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으나, 그 양식화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많이 접했던 중세의 조각에서 얻은 영향으로 추정된다. 아프리카 종족 마스크에 대한 흥미는 초상화에서 보인다. 조각과 회화작품 모두에서 모델의 얼굴은 아몬드 같은 독특한 눈, 꼭 오므린 입, 왜곡된 코 그리고 길게 늘어진 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상은 고대 이집트의 그림과도 유사하다. 이 당시 모딜리아니는 수틴(Chain Soutine) , 키슬링(Moise Kisling) , 피카소(Pablo Picasso) ,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 후앙 그리스(Juan Gris), 자코브(Max Jacob) , 장 콕토(Jean Cocteau)  같은 몽파르나스의 작가와 친구들의 초상화 시리즈를 그렸다.

 

 

잔느 에뷰테른과의 비극적인 사랑과 죽음

 

1917년 여름, 모딜리아니는 러시아 조각가 차나 올로프(Chana Orloff) 의 소개로 일본인 화가 츠구하루 후지타(Tsuguharu Foujita) 의 모델이었던 19살의 잔느 에뷰테른을 만난다. 보수적인 부르주아적 배경을 가진 에뷰테른의 가족은 모딜리아니를 버림받은 낙오자보다 못한 화가, 유태인이라는 점에 반감을 갖고 둘의 만남을 반대했다. 결국 에뷰테른은 모딜리아니와의 관계 때문에 열성적인 로마 가톨릭이었던 가족과의 인연마저 끊게 되었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은 함께 살았다. 그리고 그해 겨울, 1917년 12월 3일에 모딜리아니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베르트 베이유의 갤러리에서 첫 번째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그곳 유리 전시장에 걸려 있던 모딜리아니의 누드 작품 두 점을 본 경찰의 제재로, 전시회는 오픈한 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모딜리아니와 에뷰테른은 니스로 여행을 떠났고, 거기에서 딸을 낳아 잔느라는 같은 이름을 지었다. 니스로의 여행은 레오폴드 츠보로스키, 모딜리아니, 후지타 그리고 다른 작가들에 의해 조직된 것으로 부유한 관광객들에게 그들의 작품을 팔기 위한 것이었다. 모딜리아니는 몇 점의 작품을 팔았으나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딜리아니는 이 시기 동안 가장 인기 있고 높은 평가를 받는 걸작들을 제작했다. 그는 일생 동안 많은 작품을 팔았지만, 결코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 번 돈은 곧 술과 약으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1919년 5월 그들은 딸과 함께 파리로 돌아왔고 아파트를 빌렸다. 그곳에서 잔느 에뷰테른과 모딜리아니는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그들만의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에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실신 상태도 잦아졌다. 1920년, 며칠 동안이나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아래층에 사는 이웃이 그의 집에 확인 차 들어갔을 때, 침대 위의 모딜리아니는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임신 아홉 달째에 접어든 에뷰테른의 손을 잡고 누워 있었다. 의사를 불렀으나 모딜리아니는 불치의 결핵 수막염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도 할 수 없었다. 1920년 1월 24일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의 많은 작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에뷰테른은 그녀의 부모가 데리고 갔으나, 그녀는 너무나 큰 상실의 슬픔에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에뷰테른은 모딜리아니가 죽은 지 이틀 후에 5층에서 뛰어내려 아홉 달 된 뱃속의 아이와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죽어서도 모델이 되어달라는 모딜리아니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에뷰테른의 적대적인 부모는 1930년이 지난 후에야 에뷰테른의 묘를 모딜리아니와 함께하는 것을 허락했다.

 

 

 

 

모딜리아니는 가난과 궁핍 속에 죽었다. 일생에 단 한 번 개인전을 하였으며, 끼니를 위해 레스토랑에 수많은 그의 그림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평판은 널리 알려졌고, 작품 가격은 엄청나게 뛰었다. 또한 그의 일생은 세 편의 영화, 한 편의 다큐멘터리, 아홉 개의 소설과 연극에서 다루어졌다. 플로렌스에 있는 모딜리아니의 여동생이 입양한 15개월 된 딸 잔느(1918-84)는 성장하여 아버지의 바이오그라피 [Modigliani: Man and Myth]를 썼다.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출처: 네이버 '오늘의 미술' 코너, http://navercast.naver.com/art/theme/2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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