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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2-04 17:47
인상파 아틀리에 - 르누아르, [물랭 드 라 칼레트 무도회]
 글쓴이 : 재원아트
조회 : 7,411   추천 : 0  

 

파리의 오르세 박물관에 가면 꼭 봐야할 그림 중 하나가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Le Moulin de la Galette]이다. 1876년에 그려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파리 문화에서 느낄 수 있는 화사하고 흥성한 정서에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샹들리에 불빛이 흔들리는 화려한 무도회장에서 파리 시민들은 즐겁게 춤을 추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일명 파리지앵의 이상향이 있다면 이 장면이 보여주는 이미지 자체일 것이다.

 

 

파리의 화려한 무도회장과 르누아르의 그림 양식

이 그림은 야외의 무도회장을 묘사하고 있는데, 얼마나 그 느낌이 생생한지 음악소리와 옷깃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르누아르의 천재성이 아낌없이 드러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상을 표현하기 위해 르누아르는 정밀묘사를 택하지 않고 색감을 서로 번지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관객은 사물 자체보다도 그 사물을 통해 만들어진 인상에서 사물의 본질을 유추해볼 수 있다. 모네가 그린 [카푸시네 대로 Boulevard des Capucines]라는 그림도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1873년에 그린 이 그림에서 모네는 런던에서 배워온 새로운 기법을 마음껏 실험하고 있다. 이런 파격은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일정한 보수주의와 차별할 수 있는 것이다.

 

르누아르는 가장 혁신적인 순간에도 모네에 비해 훨씬 고전적이었다. 물론 반짝이는 빛과 색감에 대한 묘사, 그리고 일상의 삶을 스냅사진처럼 포착하는 방식은 인상파의 전매특허였고, 초기 르누아르는 이런 원칙을 개성적으로 구현했다. 그러나 그에게 인상주의에 대한 확고한 확신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1880년대 중반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와 결별하고 라파엘주의로 복귀한다. 이탈리아를 둘러본 뒤에 그는 지금까지 이루어온 예술적 성취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다. 라파엘과 르네상스 그림들을 봤을 때, 그는 오랫동안 내면에 잠자고 있던 어떤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드가가 노골적이었다면 르누아르는 모호했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르누아르는 1880년대 중반부터 인상파와 다른 길을 간다. 이때부터 르누아르는 일련의 초상화와 누드를 그리기 시작하는데, 1887년에 그린 [목욕하는 여인들]은 변화한 르누아르의 기법을 잘 보여준다. 풍경에 대한 묘사는 과거와 비슷하지만, 여인들의 육체를 표현하는 방식은 훨씬 선명하다. 특히 윤곽선을 강조해서 그리는 것은 라파엘의 영향을 읽을 수가 있는 부분이다. 일명 ‘앵그르 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 그림들은 르누아르에게 일어난 변화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보다 6년 일찍 그려진 [테라스에 있는 두 자매]와 이 그림을 비교해보면 무엇이 바뀌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테라스에 있는 두 자매]의 경우 한 눈에 봐도 르누아르가 여전히 인상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전히 그는 ‘야외’를 그리고 일상의 포즈를 화폭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르누아르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일단 마무리하고 다시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로 돌아가 보자. 그냥 한가하고 흥겨운 한때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림의 맥락을 파고 들어가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사실들이 숨어 있다. 이 그림은 확실히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그게 뭘까? 이 그림에 등장하는 ‘물랭 드 라 가레트’가 어떤 곳인지를 알면 수수께끼가 풀릴 것이다. 이곳은 보불전쟁이 끝나고 강화조약에 불만을 품은 국민방위군 일부와 파리 시민들이 연합해서 만들어낸 파리코뮌이라는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파리코뮌  당시에 지도부가 있던 곳이 바로 이 무도회장이었다. 

 

 

 

전쟁과 코뮌의 기억을 지우려는 파리시민의 무의식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어쩔 수 없이 프러시아와 평화조약을 맺는다. 알사스와 로렌 지방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맺은 치욕의 조약이었다. 파리는 아비규환이었다. 수많은 패잔병들과 실업자들이 거리를 배회하면서 먹을 것을 찾는 처참한 모습은 나폴레옹 3세가 약속했던 그 장밋빛 미래가 아니었다. 병사들은 국민방위군에서 지급하는 쥐꼬리만한 보수로 생활했고, 나중에 이 돈은 실업수당으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새롭게 들어선 부르주아 정부는 이 수당을 폐지해버리고 급기야 주택 임대자들이 집세를 소급 추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상황은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수상으로 선출된 티에르는 파리에 대한 장악력을 갖고 있지 않았고, 상황은 분노에 찬 국민방위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전쟁에서 수행한 임무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고, 정부의 실책으로 프러시아에게 패배했다고 성토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굶주림에 속수무책이었던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이 동조하기 시작했고, 좌파들이 조직한 ‘공화위원회’가 힘을 얻었다.

 

1871년 벽두에 좌파 위원들이 대표부를 설립해서 코뮌을 구성했다. 이것이 바로 파리코뮌이었다. 그러나 파리코뮌은 정부군의 반격으로 ‘피의 주일’이라는 끔찍한 파괴의 잔해만을 남긴 채 막을 내린다. 4만 명이나 되는 죄수들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런던에 있던 모네는 쿠르베도 총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휩싸인다. 피사로에게 모네는 “베르사이유의 정부군이 정말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잘못된 것이다. 쿠르베는 총살형에 처해진 게 아니고 벌금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후일 스위스로 탈출했기 때문이다. 보불전쟁과 파리코뮌의 상처는 파리지앵이라는 프랑스 중간계급의 꿈을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끔찍한 현실은 빨리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는 이런 파리지앵의 무의식을 드러낸다. 파리코뮌 기간 동안 첩자로 오인당해 국민방위군에게 총살당할 뻔했던 르누아르에게 전쟁과 폐허의 기억은 잊어버려야할 대상이었다. [물랭 드 라 갈레트]에 등장하는 파리 시민들은 이처럼 과거를 한시바삐 잊어버리고 유토피아주의에 들떠 있던 과거를 되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 무기력했지만 화려했던 파리지앵의 꿈이 이 그림을 선명하게 수놓고 있다.

 

이택광 / 문화비평가,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대학교에서 철학석사학위를, 셰필드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네이버 '오늘의 미술' 코너, http://navercast.naver.com/art/impression/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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